01도입은 했는데
“작년에 AI 도입한다고 예산 꽤 썼잖아. 그거 지금 어떻게 됐지?”
“…쓰긴 쓰는데, 결국 담당자가 다시 확인해요.”
— 도입 1년 뒤에 흔히 오가는 대화기술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요즘 AI는 어지간한 문서는 읽고, 요약하고, 분류합니다. 그런데도 현장에서 겉도는 이유는 대개 그 AI가 어느 자리에 놓여야 하는지를 아무도 정확히 몰랐기 때문입니다.
자리를 정하려면 전체 구조가 있어야 합니다. 이 일이 무엇을 받아서 무엇을 내놓는지, 그 산출을 누가 기다리고 있는지, 어떤 규정이 이 판단을 묶고 있는지 — 그것이 그려져 있지 않으면 AI는 ‘어딘가 편해 보이는 자리’에 놓입니다. 그리고 그런 자리는 대개 정말로 바꿔야 할 자리가 아닙니다.
02“데이터가 없어서”라는 오진
AI 전환이 잘 안 되는 이유를 물으면 십중팔구 데이터 이야기가 나옵니다. 데이터가 흩어져 있고, 품질이 나쁘고, 쌓아 두질 않았다는 것입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다만 한 겹 아래가 있습니다.
데이터는 언제나 어떤 일의 결과로 생깁니다. 그 일이 무엇이고 누가 어떤 기준으로 하는지가 정의돼 있지 않으면, 데이터는 쌓여도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없는 숫자가 됩니다. 같은 이름의 필드가 부서마다 다른 뜻으로 쓰이는 일이 흔한 것도 그래서입니다.
일하는 방식이 정의되지 않아 데이터의 뜻을 모르는 것입니다.
03지도 없는 내비게이션은 없다
내비게이션이 길을 안내할 수 있는 건 지도가 먼저 있기 때문입니다. 지도가 없으면 아무리 좋은 알고리즘도 안내할 수 없습니다. 위성사진만 주고 “알아서 길을 찾아 보라”고 하면 곤란해지는 것과 같습니다.
회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업무 절차서는 위성사진에 가깝습니다 — 정보는 다 있지만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프로세스 모델이 그 지도이고, AI는 그 위를 달리는 내비게이션입니다. 순서가 뒤바뀔 수 없습니다.
04비효율을 자동화하면, 비효율이 빨라진다
빌 게이츠가 남긴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 효율적인 업무에 자동화를 적용하면 효율이 커지고, 비효율적인 업무에 자동화를 적용하면 비효율이 커진다.
이 말이 무서운 이유는, 자동화가 잘못을 없애 주지 않고 더 빨리, 더 많이 저지르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결재가 세 단계 겹쳐 있는 절차를 그대로 자동화하면, 겹친 결재가 자동으로 세 번 돌아갑니다. 그리고 이제는 왜 세 번인지 묻는 사람조차 없어집니다.
현행 업무를 그리는 일에 매달리다 목적이 바뀌어 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개선하려고 그리기 시작했는데, 어느새 지금 방식을 그대로 전산화하는 일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프로세스 혁신을 말하는 이들이 “현행 분석에 시간 쓰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경고가 현행을 몰라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미래의 모습이 아무리 좋아도 여기서 거기까지 가는 길이 있어야 하고, 그 길은 지금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정확히 아는 데서만 나옵니다. 그리지 않고 뛰어넘으려다 무엇이 부러지는지는, 600만 달러짜리 전화 한 통 이야기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05그림 위에서만 보이는 것
그렇다면 프로세스를 그려 놓으면 AI를 얹을 자리가 어떻게 보이는가. 저희는 ICOM 네 면을 단서로 읽습니다.
규정·기준서·체크리스트가 이미 글로 있는 일입니다. 판단의 근거가 밖에 나와 있으므로 AI가 1차 판단을 맡기에 가장 안전한 자리입니다.
같은 일을 사람이 매번 손으로 하는 자리입니다. 다만 반복이 곧 자동화 후보는 아닙니다 — 그 반복이 실은 검증 장치인 경우가 있어, 없애면 오류가 그대로 흘러갑니다.
규모가 어느 정도 되는 모델은 거의 예외 없이 서로 닮은 활동을 드러냅니다. 세 부서가 각자 만들던 같은 보고서가 그림 위에서 겹쳐 보이는 순간, 통합이 곧 개선입니다.
연결이 끊긴 자리입니다. 여기는 AI를 얹을 곳이 아니라 프로세스를 고쳐야 할 곳입니다. 끊긴 채로 자동화하면 끊김이 굳어집니다.
네 번째 항목이 중요합니다. 프로세스를 그리는 일의 성과는 AI를 얹을 자리를 찾는 것만이 아닙니다. 오히려 AI 없이도 당장 고칠 수 있는 것들이 먼저 드러나는 경우가 많고, 그 개선만으로 모델링 비용이 회수되기도 합니다.
좋은 프로세스 모델은 완성되고 나면 아주 단순하고 당연해 보입니다. 거기서 드러난 개선점도 “이건 원래 알던 거 아닌가” 싶습니다. 하지만 그리지 않았다면 그 누구도 짚지 않았을 것들입니다. 모두가 어렴풋이 알지만 아무도 정확히 말하지 못하던 것을, 그림이 말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06모델을 위한 모델은 만들지 않는다
여기에는 함정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리는 일 자체가 목적이 되는 것입니다. 잘 그려진 모델이 아무도 열어 보지 않는 캐비닛에 들어가는 결말입니다.
그래서 IDEF0는 모델의 첫 장에 목적(Purpose)과 관점(Viewpoint)을 반드시 적게 합니다. 목적은 “이 모델은 ~하는 데 쓰인다”라는 문장으로 씁니다. 무엇에 쓸지 못 적으면 아직 그릴 때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관점도 마찬가지입니다. 같은 업무라도 경영진의 눈으로 보는 것과 현장의 눈으로 보는 것은 다릅니다. 하나의 그림에 모든 관점을 담으려 하면 아무도 읽을 수 없는 그림이 됩니다. 누구의 눈으로 볼지 먼저 정하는 것 — 그것이 그리기의 첫 단추입니다.
07그리고, 빠지지 않는다
업계에는 오래된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어느 대형 회계법인의 임원이 한 말입니다 — “우리 일은 개선 보고서를 만들고, 실행이라는 어려운 부분에 들어가기 전에 빠지는 것입니다.” 실행에는 실패와 초과 비용의 위험이 있으니, 권고안까지만 내고 손을 떼겠다는 뜻이었습니다.
솔직한 말이지만, 회사 입장에서 보면 가장 어려운 부분이 통째로 남습니다. 그림은 받았는데 그걸로 무엇을 어떻게 바꿔야 할지는 다시 자기 몫이 되는 것입니다.
유명소프트가 일하는 순서는 이렇습니다. 그리는 데서 끝나지 않고 얹고, 검증하고, 남는 데까지 갑니다.
업무를 IDEF0로 그려 ‘지금 어떻게 일하는가’를 몇 장의 그림에 담습니다.
그 그림 위에서 적용 지점과 기대효과를 발굴합니다.
우선순위와 투자를 정하고 작게 만들어 검증합니다.
실행하고, 직원이 스스로 이어가도록 정착시킵니다.
유명소프트는 자사 발주관리시스템(OMS)을 이 순서대로 만들었습니다. 먼저 그리고, 그 위에 AI를 얹었습니다. 남에게 권하기 전에 저희가 먼저 해 본 순서입니다.
08그래서 사람이 할 일
AI가 잘하는 것은 정해진 것을 빠르게 처리하는 일입니다. 사람이 해야 할 일은 그 앞에 있습니다 — 무엇이 정해진 것인지 정하는 일. 어떤 판단을 기계에 넘기고 어떤 판단을 손에 쥘지, 무엇을 없애고 무엇을 남길지 정하는 일 말입니다.
그 결정은 그림 없이는 내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순서는 언제나 같습니다 — 먼저 그리고, 그다음에 얹습니다.
AI를 어디에 얹을지 고민 중이시라면, 먼저 지도부터 그려 보시길 권합니다.
업무 절차서가 없어도 괜찮습니다 — 설명만 하시면 AI가 받아 적습니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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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rence G. Feldmann, The Practical Guide to Business Process Reengineering Using IDEF0 1998년. 저자는 SofTech에서 Douglas T. Ross와 함께 일하며 IDEF0 정립에 참여했고, 이후 미 국방부의 조직 개편에 이 방법을 적용한 당사자입니다. 이 글에서 — 현행 업무를 그리는 일을 둘러싼 논쟁과 그 위험 세 가지, “모델을 위한 모델은 만들지 않는다”는 원칙과 목적·관점 진술, 회계법인 임원의 말, 규모 있는 모델이 닮은 활동을 드러낸다는 관찰, 그리고 잘 그린 모델은 완성되면 뻔해 보인다는 지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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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chael Hammer · James Champy, Reengineering the Corporation 1993년. 이 글에서 — 본문의 “프로세스 혁신을 말하는 이들이 현행 분석에 시간 쓰지 말라고 경고한다”는 대목. 근본적·급진적 변화를 앞세운 관점의 출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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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ll Gates, Business @ the Speed of Thought 1999년. 국내 번역서 『빌 게이츠 @ 생각의 속도』. 이 글에서 — 효율적인 업무에 자동화를 적용하면 효율이, 비효율적인 업무에 적용하면 비효율이 커진다는 말.